오리엔트 특급 살인 단상(오리엔트 특급 열차에 조두순을 태울 것인가)



 기대를 많이 했지만 영화 자체는 무난한 수작으로 평가될 정도라고 생각된다.
 고증에 공을 많이 들였는지 모든 장면이 고풍스럽고 아름다웠으며, 연기자들의 연기가 흠잡을 데 없었고
 연출력도 나쁘지 않았다. 

 다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고 있는 작품을 영상으로 옮길 때(그것도 두 번째라면)에는 영화적 재미 측면에서 고민을 더 했어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예쁘게 공들여서 만들면 나머지는 대충 알아주겠지, 이런 느낌?

 추리를 하게 되는 과정에서 각 용의자에 대한 인터뷰가 핵심인데 그것도 대거 생략되어서 추리극보다는 그냥 인간군상극? 정도가 되어버렸고, 애초에 필요없는 액션신은 왜 들어간 것인가...(한숨)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상적이었던 것은 영화를 하나로 아우르는 하나의 메세지의 존재감이었다. 
 정의란 무엇인가. 
 시스템을 신뢰할 수 없을 때, 개인이 심판을 내릴 수 있는가. 하는 해묵은 메세지를 깊이 다루고자 한 점이 돋보였다. 
  
 실제 소설 속에서 포와로는 케네스 브레넌이 그려낸 것보다 훨씬 더 독특하고 우스꽝스러운 캐릭터이고, 오리엔트 특급 살인 마지막 결말에 있어서도 그렇게 고뇌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는데, 이는 포와로가 워낙 자신만의 신념이 확고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크리스티 여사의 스타일이 좀 호탕하기도 하고. 실제로 소설 속 결말은 영화보다 통쾌하고 즐거운 분위기였던 것으로 기억하고(다들 신나게 축배를 들고 끝나는 것으로 기억함 ㅋㅋㅋ), 포와로는 다른 작품에서는 자신이 직접 악한을 처단하기도 하고 살인사건을 덮어주기도 한다.
 
그러나 케네스 브레넌은 에르큘 포와로를 정의의 관념 앞에서 밤새 고뇌하고 흔들리는 진중한 인물로 그리는데 (본인이 주연이라서 멋있게 연출한 것 같기도...) 그러다 보니 오히려 캐릭터는 약해지고 영화적 재미는 반감되지 않았나 생각된다. 

감독 나름대로는 원작의 결말이 지나치게 사이다였다고 생각했을 수 있고 과연 그것이 옳은 해결책인지에 대해서는 더 무거운 고민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정의로운 행동에 대한 논의가 반드시 진지하고 복잡해야 하는가? 후련한 복수극은 어마어마한 악에 대항하는 것임에도 절대적으로 지양해야 하는가?

극단적인 소설 설정에서 나온 질문이지만, 최근에 우리 사회에도 비슷한 질문이 던져진 것을 본 적이 있다. 
청와대에 조두순의 무기징역 청원이 올라왔었고, 인터넷에서는 심심찮게 그가 출소하는 날 누군가에 의해 살해당했으면 좋겠다는 글이 올라온다. 
모두가 조두순이 오리엔트 특급 열차에 탑승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하지만 그 아이디어의 무게는 가볍지 않다. 
그를 열차에 태우고 난 후에는, 내가 살인자가 될 것인가? 아니면 손은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더럽히게 하면서 그 살인자를 용서해 줄 것인가? 아니면 조두순을 살해하고, 그 살인자도 함께 처벌할 것인가? 우리 모두가 같이 그를 살해해야 할까?

 청와대에 청원을 올리는 사람도, 이에 투표를 한 사람도, 답변을 해야 하는 정부도 모두 같은 고민을 했을 것이다. 
 

이 질문의 무게를 알기에 케네스 브레넌은 아마 원작의 분위기를 살짝 바꾸지 않았나 싶다(지극히 개인적인 견해이다)
그러나 굳이 그럴 필요가 있었을까? 
 
아가사 크리스티 여사는 기본적으로 인간의 본성에 대해 깊이 탐구하고 끊임없이 고민했던 작가였다. 
그녀의 신념은 (그녀가 공공연히 밝혔듯이) 애초에 '근원이 악한 인간'이 종종 존재한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그녀가 인생의 경험과 통찰을 통해 깨달았듯이 그녀의 페르소나인 미스 마플과 에르큘 포와로 역시 예리한 눈으로 이러한 '악'을 탐지하고 감지한다.
그리고 그녀는 이러한 '악'은 교화될수도 변화할 수도 없다는 믿음 하에 미스 마플이나 포와로로 하여금 그들을 단호히 처벌케 한다. 

오리엔트 특급살인은 전통적인 악에 대한 처벌이라는 관점에서는 새로운 작품이었지만
크리스티 여사의 기본적인 철학이 가장 선명하게 반영된 소설이라고 생각한다.(여사님 본인도 가장 좋아하는 스스로의 작품들 중 오리엔트 특급 살인을 항상 꼽았다) 감당할 수 없는 악이 존재하는 것을 눈 앞에서 볼 때, 이를 처치하는 것이 바로 정의가 아닌가? 법과 질서라는 명목 하에 이를 피하는 것이 오히려 악이 아닌가? 

크리스티 여사는 이 모든 질문에 그렇다. 라고 대답하는 작가였다. 따라서 원작의 경쾌한 결말 분위기를 살리지 않은 것은 오히려 살짝 비겁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든다. (재차 말하지만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견해....) 

지금 누가 당장 조두순을 찔러 죽여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현실에는, 당연히, 케네스 브레넌이 분한 포와로처럼 모두가 고뇌하고 고민할 수밖에 없다. 
청와대도 그렇게 답변하지 않았는가? 실질적인 정의가 아니라 법질서와 사회 유지를 위해 그를 다시 가둘 수는 없다고.
  
그러나 적어도, 영화에서는,
특히 이미 한 거장이 자신의 분명한 신념에 기반하여 창조한 세계관 속에서 절망 가운데 분연히 일어난 사형 집행자들을 마지막에 그렇게 무기력하고 우울하게 그릴 필요가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계속 의문이 든다.  


명쾌한 답이 있는 세계에서조차 정의 실현은 소극적일 수밖에 없다면, 현실 속에서의 우리 평범한 사람들은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문과충의 비트코인 단상 끝없는 고통 그거슨 공부


1. 

비트코인보다는 블록체인 시스템이 의미가 있는 것 같다. 
1)탈중앙화, 2) 기관없는 신뢰시스템, 3) 전자계약의 가능성 등을 생각할 때, 금융 산업 체계를 뒤바꿀 시스템임은 확실한 듯.
다만 비트코인이 그 시스템의 중심에 서게 될 지는 의문. 
일단 비트코인이 활용될 수 있는 시장이 거의 없고, 이 화폐가 활용되고 검증될 수 있는 기회가 전혀 없었으니...

이더리움 알트코인 리플 라이트코인,,,, 너무 많아서 비트코인 카피인가? 그것까지 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사용할건지?
결국 이 중에서 살아남는 화폐가 지배자가 되지 않을까(완전히 새로운 화폐가 나타날 수도 있고) 


2. 

자꾸 비트코인은 화폐로서의 실물 '가치'가 없어서 위험하다고 하는데, 레알? 언제부터 화폐가 가치 표상이었지?
만원짜리 오만원 짜리 종이 쪼가리나 인터넷뱅킹할 때 그 숫자가 표상하는 가치가 있는건가?

비트코인은 일단 시장에서 활용만 된다면 화폐가 될 것이 확실한 것 같은데, 
기본적으로 신뢰시스템이 갖춰져 있어 한국은행과 같은 기관이 필요 없기 때문에.  
그런 차원에서는 비트코인이 게임머니와 같다느니, 다단계랑 같다느니 하는 말은 또 과한 폄훼같기도 하다. 

그러나 가장 큰 문제는 시스템이 생기기 전에 풀렸다는 것이고, 따라서 지금 과열 현상은 안정화 전 혼돈 상황이라서 절대 절대
미래에 실제로 상용화 될 시스템은 현재와 같이 않을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비트코인이 위험하다는 것. 


3. 

그렇다고 비트코인이 우리의 미래라거나 그런 게 아니고 블록체인이 미래가 될 수 있기 때문에
다들 비트코인에 한 줄기 희망을 버리지 못하는 듯. 

가격이 계속 오르는 것은 투기자본이 계속 몰리니까 그러는 것일 텐데 
아마도 앞으로는 한동안 오르지 않을까 싶다.
회사 사람들이 비트코인 투자 얘기를 시작한 지 꽤 됐으니, 가정에서도 그런 얘기가 슬슬 들리기 시작하면 폭락할 때 아닐까 싶다ㅎㅎ


4. 

미국에서 비트코인을 금융상품으로 인정했다고 해서 가치는 더 폭등할 듯

근데 화폐로 인정한 게 아니라 금융 상품으로 인정한 거면 큰 의미 없지 않나? 모두가 이걸 깨닫기 전에 비트코인에 올라타는 게 좋을 듯 ㅎㅎㅎㅎ(이왕 올라탈거면 말이다...)

휴....이럴 때는 문과충 중에서도 인문충인게 좌절스러움. 
IT건 금융이건 이해를 도통 할 수가 없으니

누가 좀 과외 좀 해줬으면 좋겠다.




BTS가 왜 인기있는지는 내가 잘 알겠다(비주류의 힘) 내일과 같은 오늘



 BTS의 미국적 인기는 하나의 현상이 아니고 차곡차곡 쌓인 과정의 결과물에 가깝다.
 싸이의 인기가 바로 신드롬이자 일시적 현상이었다면, BTS는 미국이 선도하는 대중문화가 인터넷 시대를 맞아 어떤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를 보여준 하나의 결과물이다. 

 따라서 싸이와 BTS의 인기를 비교하는 것은 바보같은 짓이며, Kpop이라는 공통분모는 둘 사이에 지극히 얕고도 좁은 영역이다.
 언론들이 BTS의 인기가 SNS니, 춤이니 kpop의 부활이니 떠들지만 개인적으로는 다 헛다리 짚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개인적으로 BTS의 인기는 kpop의 우월함 때문이라기 보다 BTS 자체가 현재 대중(이제 주도권을 쥐게 된 청년층)이 대중문화에 있어 원하는 맥을 잘 짚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미국에서 중,고등학교를 다니던 시절 나같은 비주류(라고 쓰고 찐따라고 읽는다)들이 심취해 있던 문화는 일본 애니메이션이었다. 
 특히 에반게리온이 그 중심에 있었는데 사실 나는 에반게리온이나 일본 애니에 1도 관심이 없었지만, 주위 친구들이 다 이를 좋아하는 분위기 였기 때문에 나도 이 문화권에 속해 있다고 당.연.히 생각하면서 학교를 다녔다. (미안하지만 친구의 모든 설명을 듣고 애니도 다 봤지만 사실 아직까지 에바가 무슨 내용인지 모르겠다)

 당시 애니메이션이 인기 있었던 건 현실부정, 초인적인 힘, 우울함, 비주류로서의 좌절감과 분노의 폭력적 분출 등 비주류가 원하는 요소들을 대충 다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일본애니는 특유의 그 저변적 느낌 때문에 쌩뚱맞은 사람들에게 전파하기가 어려웠고, 
 서양인들에게 근본적으로 공감하기가 어려운 정서가 있는데다 당시에는 유투브나 SNS가 존재하지 않아서 더더욱 그 주류로 가는문턱을 넘기가 힘들었다. 따라서 일본 애니는 주류 문화가 되지 못했다고 본다. 여기에 수많은 반론이 있을 수 있겠으나, 어디까지나 일반적인 체감 수준에서 이야기하는 것이다. 하지만 BTS는 다르다. 한국 pop이라는 비주류 요소거 있는 동시에 universal한 춤과 노래 그리고 전파 가능한 캐릭터가 존재한다.  

 경험칙상 미국에서 대중문화의 수문장은 중고등학생들이다. 여기서 모든 것이 판명난다고 봐도 무방하다. 감수성이 예민하고 자기 표현욕구에 날뛰는 이 틴에이저들의 엄격하고 촘촘한 그물망을 뚫어야지만 주류 문화권 안으로 편입된다. 이들은 자신이 쪽팔릴 만한 문화를 절대 친구들에게 전파하지 않는다. 따라서 그 문화는 비주류들이 공감할 수 있는 공감대가 있어야 하는 동시에 세련되어야 하며 일정한 수준 이상의 것이어야 한다. BTS는 이 모든 요소를 두루 갖춘 '아티스트'라고 한다. 즉 셀레나 고메즈와 저스틴 비버, 켄달 제너의 fabulous한 라이프에 지치고 더 이상 공감하고 싶지 않은 비주류 틴에이저들이 찾아 헤메던 중 걸린 것이 바로 BTS인 것이다. 

그리고 그 다면체의 아티스트 정체성을 부여하는 데에는 SNS가 큰 역할을 했다. 한국 공중파 방송보다 라이브 앱이나 트위터가 더 세련된 문화인 것은 자명하고, 그렇다면 어떤 것에 더 집중해야 하는지도 명확해 진다. (기성세대는 잘 모르는 것 같지만... 요즘 한국 방송국 시상식이 온라인에서 무슨 의미가 있...?) 

이모가 절대로 방탄 덕후라거나 막 팬질하거나 그래서 그러는 게 아니라규(.....)!!!
 


 북미 사회에서 KPOP은 여전히 비주류이다.
 유툽 리액션 비디오들을 보면 최근까지도 미국 사회에서 주류에 속하지 못한 사람들이 kpop에 심취한 모습을 보여준다..

 제일 유명한 유투버는 JRE인데 얘가 친근해서 자주 리액션 비디오를 봤었는데 역시나 BTS 사랑한다. 
 필리핀계 미국인으로서 자신의 삶이 힘들 때 때 Kpop이 많은 위로가 되었다는 얘기를 자주 한다

       스스로를 BTS TRASH라고 부르는 용기있는 남자.............올곧은 kpop way
 
 즉 Kpop은 한국계 이민자들을 포함해서 소수인종이나 비주류들에게 저 멀리 한국이라는 나라의 문화도 이렇게 멋있을 수 있다는 걸 보여주면서 묘한 동질감과 이에서 파생되는 위로를 제공해 주는 역할을 해 왔다. 자신들의 정체성을 완벽하게 파악하지 못한 교포 2,3세들이나, 일본 애니와 동양 문화 전반에 관심이 있는 비주류 백인들, 성소수자들 등. 

 그래서 이번 AMA 퍼포먼스를 보는 유투버 ARMY들의 공통적인 반응은 'I feel so PROUD'였다. 
 왜 북미에 사는 그들이 한국 케이팝 그룹이 미국 공중파 음악쇼에 데뷔하는 데 그토록 긴장하고 이를 잘 마쳤을 때 그토록 자랑스러워하는가?
 이미 BTS에 스스로를 투영한 사람들에게 있어 BTS는 이미 자신이 속해있는 미국 사회보다 더 가까운 문화가 되어 버린 것이다.
 BTS가 성공적으로 AMA에 데뷔했을 때 그들은 자신들이 주류 사회에 인정받는 기분을 느낀 듯 하다. 

 
 
캐나다에 사는 재미교포 형제들인 것 같은데 Captain Korea라는 채널 운영중이다. BTS가 AMA에 나올 때 마치 자신들의 일처럼 긴장하더라. 어떻게 보면 이들에게는 정말 '내'일이었다. 인종적으로 한국인인 자신들이 앞으로 살아 나가야할 북미 사회 속에서 방탄에 대한 평가는 그들 스스로가 받게 될 평가에 가깝다. 

 방탄 AMA를 정말 긴장하면서 보던 오빠들...so proud를 연발했다. 


 계속 비주류라는 얘기를 했지만 결국 주류 대중문화는 항상 비주류로부터 시작한다. 
 힙합도, 락도, 재즈도 다 비주류로 시작했다

 세련되고 우월한 주류 셀럽이 무지몽매한 대중들에게 영향을 끼치는 것이 결코 아니다.
 대부분 비주류에 속하는 대중들이 스스로가 원하는 모습을 셀럽에게 투영시키기 때문에 그 욕망이 바로 셀럽의 모습으로 형상화 되는 것이다.

 따라서 한국 Kpop 그룹이 미국 주류 대중문화를 아무리 잘 따라한 들, 이류가 될 수밖에 없다. 
 나 멋있지? 나 스웩 짱임.... 이런 태도는 미국에서나 한국에서나 결국 오 그래, 잘 따라하네, 이상의 반응을 이끌어 낼 수 없다. 
 
 비주류이지만 멋지고 스윗한 BTS가 전 세계에 내가 너고 네가 바로 나야, 너도 사실은 나처럼 멋있는 사람이야.. 라는 위로를 전했을 때, 승부는 판명난 것이다.
 이 환상을 심는 것이 대중문화의 역할이다. 
 그것이 아무리 상업적인 메세지일지라도
 그 안에서 위로를 받고 싶은 대중의 힘은 막강하고, 그 열망을 폄하할 자격은 아무도 없다. 

 BTS가 굳이 그렇게 의도하지는 않았던 것 같지만
 BTS는 미국 비주류에게 위로를 주고 동시에 나아갈 방향도 제시해 주었다. 그리고 AMA에서 자신들이 주류에 꿀리지 않는다는 것을 몸소 증명함으로서 앞으로 주류 문화가 될 가능성이 커 보인다. 

 대중문화 사업에 종사하는 이들이라면 이 교묘한 맥락을 아주 섬세하고 정확하게 잘 읽어야 한다. 
 kpop의 우월성이라는 헐거운 틀로 바라보면 절대 이 결과론적인 인기를 이해할 수도 분석할 수도 없다.
 BTS보다 춤 잘추는 사람들은 미국에 더 많다, 노래도 더 잘하는 사람은 널리고 깔렸다. 대중문화는 실력이 아니라 메세지이다.
 대중문화는 현상이 아니고 축적된 결과물이다. 

 BTS는 싸이도 PPAP도 아니다.  


토르 라그나로크, 범죄도시 단상 (한국형 히어로, 마블형 히어로와 그 한계) 미드/영화


1.

미국적인 영웅과 한국적인 영웅의 특징이 두드러진 두 영화여서 매우 흥미로웠다. 일부러 비교하려고 본 건 아니고 우연히 연달아서 보게 된 것인데 비슷한 점과 다른 점이 정말 칼 같이 분명해서 문화적인 맥락을 읽는 데 활용하기 쉬운 상징적인 두 작품이 아닐까 싶다

근육질+단순+착한심성은 미국이나 우리나라나 애정하는 캐릭터 요소인 듯하고 그로인해 파생되는 깨알같은 개그코드를 다 잘 살린 느낌이다. 단적으로 범죄도시에서는 '진실의 방' 씬이, 토르에서는 '수르트와의 대화' 씬이 가장 캐릭터를 잘 살리는 장면이었던 것 같다. 
초반에 힘의 확실한 우위에서 나오는 여유를 어떻게 잘 활용해야 하는지 고민을 많이 한 것 같고 어수룩한 상대방을 이용하는 점도 비슷한 느낌이었다. 


2.

다만 이런 확실한 힘을 가진 히어로가 어떤 일을 하기를 원하느냐에 있어 한국과 마블의 차이가 극명하다고나 할까.

한국 관객들은 한국형 히어로에게 '영웅'보다는 '대리자' 역할을 충족시켜주기를 더 원하는 것 같다. 거대한 담론이나 전지구적인 정의보다는 우리 동네, 내 이웃, 내 가족을 지키는 정도의 의리랄까, 정의라고 보기에는 모호한 그런 감정적인 분출구 역할을 시키는 것. 

따라서 한국형 히어로는 항상 인간미가 있어야 하는데, 여기서 인간미란 서민(?)적이고 항상 약자인 이웃들과 친해야 하며, 법과 위법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넘나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서민적이고, 소소한 위법행위는 웃음으로 넘기지만(여기서 대부분의 코메디 장면 나옴) 내 이웃이나 가족을 건드리는 불의에는 분노하고 항거(여기에서 클라이맥스 또는 눈물 쥐어짬)해야 하는 것인데, 생각해보면 많은 한국영화의 남자 주인공이 여기에 해당될 것이다. 

마동석이 룸싸롱에서 접대 받는 모습(...)도 그런 걸 노린 듯 한데, 이러한 강박관념이 크게 문제될 바는 아니나, 개인적으로는 이 점이한국 영화 주인공들의 캐릭터성을 약화시키는 게 아닌가 싶다. 지나치게 고결한 것도, 지나치게 비범하거나, '영웅적'인 주인공을 싫어하는 것이 한국 영화의 특징이고 그러다보니 극단적인 캐릭터가 나오기 어렵고, 드라마틱한 전개가 힘들고, 결국 선정적이거나 과도한 폭력을 억지로 우겨넣어 몰입을 시키는 방법만 택하고 있는 것 같다. (악역에도 해당되는 듯)


3. 

마블은 마블의 방식대로 이제 영웅들이 너무 클리셰가 되어 가는 느낌인데 여기는 좀 성장과 유머에 대한 강박이 있어서 그런 듯. 어떻게 보면 히어로물은 서구 영웅신화의 연속인지라 뭘 봐도 그나물에 그밥이라 이 성장 스토리를 어떻게 비트느냐가 관건이 된 듯 하고.

다행히 토르는 제인을 빼버려서 '내 여자'를 구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난 것 같고, 발키리 테사 톰슨이 술고래 여전사라는 새로운 캐릭터를 잘 창조해서 상투적인 전개를 잘 비틀었던다.

헐크의 성장 스토리도 서브 스토리로 끼워넣어 지루할 수 있는 토르의 성장 이야기를 더 풍성하게 만들어 준 것 같다. 그럴 수록 헐크 인격을 기억하지 못하는 브루스 배너가 젤 불쌍하고 ㅜㅜ
헐크도 그렇고 토르도 그렇고 능력치와 캐릭터가 성장하면서 인피니티 워를 향해 달려나갈 동력을 심어줬다는 점에서 딱 맞는 퍼즐조각 같은 이야기였다.  


4. 

그렇다고 범죄도시가 재미 없었다는 게 아니고, 객관적으로 보자면 범죄도시가 더 더 재미있었다. 다만 범죄도시는 한계치가 명확하고 2,3편이 나온다 해도 일정한 범위가 예상되는 데에 비해 토르의 경우에는 다음 마블 영화는 어떻게 될 지 한치도 예측할 수 없어서 상상의 지평을 무한으로 확장해준 다는 점에서 시야가 시원한 느낌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취향의 차이라고도 할 수 있으므로 어떤 영화가 더 낫다는 말은 아니다. 범죄도시는 이제 지쳐가는 한국 마초영화에 심폐소생술을 행했다는 점에서 후한 점수를 주고 싶고, 그나마 마동석과 장첸의 캐릭터가 강렬해서 극화로서의 성격이 선명했다.  

그럴 수록 개인적으로는 이제 한국 영화에서 뭔가 서민적이고, 아저씨/아줌마스럽지만, 나름의 정의감이 있고 클라이막스에 감정을 분출하는 캐릭터는 이제 그만 보고싶다. 마치 무기력하고 부드럽지만 속에는 열정을 품고 있는 감동적인 일본영화를 그만 보고싶은 것처럼 



5. 

그래도 진실의 방으로~는 넘나 명대사였다.

2049 블레이드러너 단상 (이제 인간이 뭔지 그만 좀 물어봐...) 미드/영화



스포일러 있음



1. 

원작에 이어 드니 빌뇌브 감독의 블레이드러너 2049를 드디어 봤다. 
전체적인 만족도는 매우 높았고, 매 순간이 즐거운 영화였다. 

스토리상으로나 비주얼적으로나 여백의 미가 가득했고 원작과 비슷하면서 전혀 다른 작품이 나와 만족스러웠다. 개인적으로 원작이 전체적인 작품성은 차치하고 내러티브 면에서 그렇게 훌륭한 것 같지는 않다는 생각이 있었는데, 2049는 그 부분이 상당 보완되었고, 생각할 거리 역시 많았다. 

느낌은 비슷하지만, 정 반대인 두 감독의 스타일을 비교하는 재미도 컸다. 리들리 스콧은 수직/상승/높은 밀도 를 자랑한다면 드니 빌뇌브는  수평/확산(퍼짐)/여백과 희박함 을 강조했다. (기분 때문인지 리들리 스콧은 이름도 뾰족뾰족한 느낌이면 드니 빌뇌브는 느릿하고 한산한 느낌ㅋㅋㅋ) 

2. 
이제는 해묵은 질문인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또 대답해야 하는 짜증스러운 상황에서 빌뇌브 감독은 정공법을 택한 듯 하다. 
유독 미국 영화는 '사랑' 또는 '관계'를 진정한 인간으로서의 기준으로 보는 경우가 많은데, 빌뇌브 이런 대중적인 노선을 취하되
좀 더 복합적으로 감정적인 사랑이 아닌 사회적인 관계 형성 측면에서 접근한 것으로 보인다.(근데 가족 드립은 이제 좀 지겹다) 

리들리 스콧 감독은 전작에서 레플리컨트들을 통해 '욕망'이 인간다움을 만든다는 암시를 준 바 있다. 인간이 되고 싶은 욕망, 오래 살고 싶은 욕망, 우월감을 느끼고 싶은 욕망 등, 그 염원에서 오는 갈등을 일종의 셰익스피어 느낌의 햄릿적인 고뇌로 표현한 장면들이 많았다. 즉 고독을 느끼며 스스로의 존재 자체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하고 회의하는 모습이 인간다움을 느끼게 해 준다고 나름의 답을 제시하였는데

빌뇌브 감독은 레플리컨트와 인간들이 서로와 관계를 맺는 다양한 모습과 방법을 보여주면서 인간은 역시 서로와 관계를 맺을 때 인간다운 것 아닌가 하고 관객에게 계속 질문한다. 대표적으로는 조이와 K의 관계가 있지만 이외에도 K와 마리에뜨 사이의 미묘한 관계, K와 국장님과의 애틋함, 데커드와 K, 월레스와 러브의 대칭적인 부자관계, 러브와 K의 경쟁하는 형제 관계, 레플리컨트 반란군들의 그루핑 등등  

이러한 관점의 차이가 화면의 차이로 나타난 것도 인상적이었다. 관계를 중시하는 빌뇌브 감독은 수평으로 퍼지는 화면을 즐겨 쓰고, 스콧 감독은 아래에서 위를, 또는 위에서 아래를 바라보는 화면을 즐겨 쓴다.  


첫 장면에 월레스의 단백질 농장 장면. 원 모양의 농장이 무한하게 수평으로 확장한다. 



위 2049에서는 위를 보는 장면은 별로 없다. 둘러보는 정도. 하지만 아래 2019에는 높은 건물들을 올려 볼 수밖에 없다

또한 스콧 감독은 거대한 빌딩과 수많은 사람, 차량들 속에 고독한 인간 개인을 강조하지만 빌뇌브 감독은 항상 관계성에 목마른 외로운 인간 한 명을 그린다.



3. 
그래서 로이 배티와 대칭점에 서 있는 K는 로이 배티만큼 멋진 역할이 아니었다. 프로메테우스의 데이빗에서도 볼 수 있듯이 리들리 스콧의 인물들은 기본적으로 혼자서 멋있음을 뿜뿜하면서 북치고 장구치는데 드니 빌뇌브의 인간관은 홀로 완성되지 않기 때문에 K는 그냥 관계성 속에서 겉도는 불쌍한 왕따로 등장한다. 껍데기라고 사람들에게 거부당하거나(이런 장면은 전작에서는 없었다), 사람이 아닌 불완전한 AI와 깊은 관계를 맺거나, 가까이 다가오는 인간은 거부하고, 아버지를 찾아 헤멘다.
(문소영 기자님도 짚었지만, 라이언 고슬링은 눈빛이 진짜 불쌍하다. 그래서 최적의 캐스팅이었음)  

4. 
그렇다면 조이와 사랑을 했으니 K도 인간이라고 보아야 하는가? 인간이 아닌 대상과 사랑하면 인간이 아닌가? 
데커드가 사람이고 레이첼이 레플리컨트였으므로 사람과 사랑한 레이첼은 인간의 신분을 획득하고, 그 사이에 태어난 아이는 앞으로 모든 레플리컨트들이 인간과 동일한 지위를 가지는 것을 상징하는가?


(조이 예쁘다 헤헤....조이 짱이다....)

영화가 던지는 일련의 질문들에 답은 없다. 인간인 우리는 스스로를 결코 객관적으로 바라보지 못한다. 정의는 제3자가 내리는 것이다. 관객은 각 질문에 대한 개인적인 견해를 가질 뿐.



개인적으로 가장 충격받은 장면이었다. 반전보다 이게 더 충격이었다 
JOI tells you what you want to hear, shows you what you want to see
해석에 따라서 꿈도 희망도 없어! K에게 망치로 후두려치는 장면. 

조이는 진심으로 K를 사랑한 게 분명하다. 문제는 조이가 자신의 고객을 무조건 사랑하도록 '설계'되어 있었다는 것.
고객이 듣고 싶은 말을 해 주고, 보고싶은 것을 보여주는 것이 그녀의 유일한 역할이기 때문에 그녀의 사랑이 진심이었음을 
K는 깨닫는다. 특별하다고 생각했던 Jo라는 이름은 결국 K보다도 의미 없는 호칭이라는 것.  

그런 의미에서 창녀였던 마리에뜨가 K와 하룻밤을 보내고 떠나면서 조이에게 한 말이 의미심장하다.
"I've been inside you, there's not much in it'(너 안에 별거 없던데) 

결국 K는 조이를 매개로 스스로에게 가장 듣고 싶었던 말, 가장 보고싶었던 것들을 보여준 것이다. 극단적인 자기애이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생물학적으로 설계된 본성을 벗어나 행동하는 인간이 어디있으며, 타인에 자신을 투영시키는 자기애가 없는 인간은 또 어디있는가?
   

5. 
결국 K는 설계된 자신의 존재 목적을 넘어섬으로 '인간'임을 증명한다(굳이 그러한 증명이 있어야 인간인지는 별개의 얘기). 
그 과정에는 항상 선택이 따르고
따라서 '진짜'인지 여부는 '선택을 했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K를 사랑(한 듯)한 조시 국장이 흘린 대사에서도 나타나듯이  
Everyone's looking for something real (누구나 진짜인 무언가를 찾고 싶은 거지)

인간은 '진짜'를 찾아나서는 본성이 있고
'진짜'는 '사랑'으로 나타나고
'사랑'은 '선택'으로 입증된다. 
즉 인간이든 레플리컨트든 '진짜'는 사랑을 위해 선택을 한다.


결국 국장은 K를 사랑함으로, K를 위해 죽음을 선택함으로서 자신의 인간다움을 증명하였고 이는 데커드도 마찬가지이다.  
사랑을 위해 선택을 하지 않은 자는 아이러니 하게도 월레스 뿐이다. 
러브 역시, 일방적인 애정 갈구였지 사랑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6.
이 모든 것도 관객인 나의 해석일 뿐
감독들도 인간이 뭔지에 대해 답은 없는게 분명하다
그니까 그만 물어봐!!!!!!!!!!!!!!!!!!! 


7. 


- 좀 이해가 안가는 게 K가 스스로를 진짜 인간이라고 믿기에는 기억 근거가 너무 빈약한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소년으로 자랐으면 나머지 기억은 어딨음? 그리고 그에 대한 의문도 1도 안가지는게 조금 구멍이랄까. 근데 레플리컨트는 인간으로 있어본 적이 없으니, 기억의 연속성이라는 개념을 모르기 때문에 의심도 못할수도....

- K는 그럼 복제인간이 아니라 일반 레플리컨트인데 기억만 심어진 건가? 영화에 나온 쌍둥이 남자애는 아닌 듯. 일단 유전자가 동일한데 남녀 쌍둥이가 말이 안되고, 그런 존재를 도망 중인 레플리컨트들이 만들 수는 없었을 것 같고. 아마 쌍둥이 남자애는 교란시키기 위한 그냥 장치 중 하나인 듯. 그렇다면 스텔린의 기억이 심겨진 레플리컨트가 더 있을 수도 있겠다 싶기도 하고. "우리 모두가 그 아이였으면 했지" 라는 대사를 봤을 때 더더욱...

- 레이첼은 전편에서도 어두운 눈동자였는데...? DNA 복제판이 기본적으로 눈동자 색이 다를리가... 이 장면은 데커드가 애써 복제 레이첼의 유혹에서 벗어나기 위해 친 구라였나?

- 월레스도 레플리컨트라고 하는데, 당최 그런 힌트가 어딨었는지 모르겠다. 눈이 멀어서????

- 크게 공감했던 문소영 기자님의 리뷰 http://moonsoyoung.com/221114923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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