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그냥 No라고 말하지 못하냐는 인생 편한 사람들에게 내일과 같은 오늘



듣고싶지 않아도 많은 말을 억지로 들어야 하는 요즘 세상, 미투 관련해서는 이미 논의가 사회에 가득 차 있는 느낌이라
한숟갈 얹고 싶지도 않지만, 최근에 들은 몇몇 코멘트가 뭔가 뚜껑을 열리게 했다. 고로 쓴다!!

'정말 원하지 않는데 왜 오피스텔로 갔느냐, 싫으면 왜 그 때 당차게 거절하고 쏘아붙이고 신고하고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느냐..'
'강하게 반항한 것이 아니니 여자도 즐긴 것이다'
'NO라고 말하지 않았으니 YES인 것이 아니냐...' 등등등등

이 진부하지만 여전히 발암에 효과가 좋은 코멘트들은 형태도 가지각색이지만
화자가 누구이든 결국은 사회적인 '위력'이라는 개념과 의미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는 자기고백이자 인간의 본성에 대한 성찰이 1도 없는 교만의 표출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은 항상 동일하다. 


내가 90년대 미국에서 초등학교를 다닐 때 학교는 모든 학생들로 하여금 D.A.R.E. 이라는 프로그램을 아주 철저하게 이수하게 했다. Drug Abuse Resistance Education의 약자인데 해석하자면 '마약 오남용 방지 교육' 정도 되겠다. 

여기서 내가 집중적으로 받았던 교육은 단 한가지. 'Just Say NO' 였다. 
마약의 중독성이 얼마나 강하고, 마약이 너의 인생을 얼마나 망치고 등등의 소위 '교육적인' 정보 전달이 아니라
학교의 Cool kids들이 마약을 권하더라도 'NO'라고 거절하라는 내용이 이 교육의 핵심이었다.

실제로 어린 청소년들이 마약을 접하는 첫 계기는 친구들의 권유로 대부분 이루어지고, 
또래들과의 관계를 망치고 싶지 않은 마음, 멋진 그룹에 속하고 싶은 소속감으로 인해 이들은 마약을 거절하지 못한다.
마약이 나쁘다는 것을 모르는 아이들은 단 한 명도 없다. 거절하지 못하는 아이들만 있을 뿐이다. 
거절해야 하는지 알지만, 사회적인 압력으로 인해 거절하지 못하도록 하는 그 무언의 압박, 그것이 바로 '위력'이다. 

그러니까 마치 물리적인 폭력에 대처하는 호신술을 배우거나
재난이 닥칠 때 대피하는 방법을 배우듯이 
이 프로그램의 교육자들은 'NO'라고 말하는 방법 역시 학습으로 취득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교육을 담당한 선생님들과 경찰관들은 어린 우리들에게 계속해서 '그걸로 친구사이가 멀어진다면 그건 진정한 친구가 아니야' '마약을 거절해서 따돌림을 당한다면 그건 영예로운 거야' 하고 여러 방법으로 거절하는 힘을 길러주는 교육을 했다. 
단호하게 거절하는 아이의 모습을 연극으로 보여준다던지, 결국 거절하지 못한 마약중독자를 실제로 불러서 강연을 듣는다던지.
실제로 위 DARE 교육은 꽤나 성공적인 프로그램으로 인정받아 미국 전역에서 여전히 이루어지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미국 청소년들은 인기있는 친구로부터 초대받은 파티에서 쿨한 친구들이 건네주는 마리화나에 NO라고 말하지 못한다. 

이렇듯이 거절 역시 학습되고 훈련되어야 하는 것이고, 학습과 훈련을 받는다 해도 'NO'라고 말하는 것은 쉽지 않다.

NO가 쉽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인생이 영화나 드라마 같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드라마나 영화에서는 상대방에게 따귀를 날리거나, 물을 뿌리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면 장면이 다음 장면으로 넘어간다.


내 손은 어떻게 씻을 것인지, 바닥에 김치는 치워야 하는지, 청소비 청구서가 올 것인지 드라마에서는 신경쓰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내가 경험한 현실은 드라마와 영화와 달리 장면 전환이 되지 않았다.
회식 자리에서 내 엉덩이를 슬슬 만지는 과장에게 따귀를 때리거나 왜이러세요! 하면서 일어나기에는
나는 그제도 어제도 오늘 아침에 그와 반갑게 인사를 했고, 점심도 같이 먹었고, 내일도 모레도, 이레도 함께 같은 공간에서 같은 공기를 마시고 업무 지시를 받으며 '동료'로서 지내야 한다. 

이런 상황에서 불꽃 싸다구는 차치하고라도 '이건 좀 아닌 것 같아요'라는 말 한마디는 내가 회사를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휘두를 수 있는 마지막 칼이었다.(이후 회사를 떠나면서도 이직하는 직장에 안좋은 평판이 퍼질까봐 결국 그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성폭력을 당하면 피해자는 무조건 감정적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사실 그렇지 않다.
부장이, 과장이, 그 누군가가 나를 터치하거나 부적절한 말을 할 때, 머리속에는 맹렬하게 계산기가 돌아간다.
'내가 방금 당한 일이 화를 낼 만큼 더러운 일인가? 그 더러움의 무게가 여기서 화를 내거나 분위기를 싸하게 만들어서 나의 1시간 후와 향후 일주일을 희생시킬만큼 큰가? 여기서 화를 내지 않으면 앞으로 나의 호구지수는 얼마나 올라갈 것인가, 그리고 그 괴로움의 무게는 또 얼마나 클 것인가?' 그리고 계산의 답은 대부분 그냥 어색한 웃음이다. (계산기가 조금 느리면 화를 내더라도 오히려 큰 부작용이 난다.)


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위력'의 개념을 모를 것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유독 '성' 문제에 있어서 여자들이 큰 소리를 낼 수 있다는 관념은 어디서 온 것인지 궁금하다. 
설마 은장도를 가지고 다니면서 회식자리에서 추행을 당하거나 은근한 성관계의 제안을 받으면 소리를 지르며 스스로를 찔러야 한다고 생각하는지?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우리 대부분은 동일한 의무교육을 받고 온순한 양이 되어 이 사회에 편입되도록 훈련받았다. 
기업이나 정부에서 일하는 사람들이라면 그러한 측면에서 더더욱 훌륭한 점수를 받은 사람들일 것이다. 
그렇다면 조직에 속한 우리들이 과장의 회식 제안에 억지로 웃으며 (자발적으로) 손을 드는 것처럼, 웃기지도 않은 부장의 개그에 아무도 시키지도 않았는데 박장대소 하는 것처럼, 성적인 부분에서도 마찬가지일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이걸 지니고 다녀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물론! 누구나 성적 자기결정권이 있고 권력관계에서 이러한 권리 행사가 무조건 박탈된다는 말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 
최선을 다해 NO 의사표시를 해야 마땅하다!
단지 세상은 그렇게 이분법적이지 않다는 말을 하려는 것이다.
술자리에서 내 손을 주무르던 과장님과, 동료 언니에게 비밀스럽게 잠자리를 제안한 국장님은 모두 그런 일이 있기 전에 진심으로 우리가 존경하고 '훌륭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던 사람들이었다. 그런 사람들이 얼굴 표정도 바뀌지 않고 갑자기 나를 성적인 대상으로 바라봤을 때, 내 머릿속에 제일 먼저 떠오른 생각은 '내일 과장님이랑 어떻게 인사하지?'였다.  

남자인 내 친구는 '아마 군대에서 정말 친하게 지내던 선임이 어느 날 나를 추행하는 그런 기분이겠지'라고 추측했다. 
아마 그 추측이 맞을 것이다.

NO는 자연스럽게 나오는 것이 아니라 DARE해야 하는 것, 한 존재의 결단과 단단한 신념 위에서 나올 수 있는 희귀한 것이다. 
그렇게 말할 수 있다면 가장 이상적이겠지만, 
그런 영웅들은 흔하지 않고, 사회는 영웅이 기준점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





   


  






덧글

  • ㅁㅁ 2018/03/13 10:49 # 삭제 답글

    그만큼 권위, 위력이랑은 상관도 없는 남자가 대부분인데 이 구조를 남자 가해자 vs 여자 피해자로 만들고 싶은 분들이 많은거죠
  • marroni 2018/03/13 19:19 #

    그렇죠. 남녀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권력구조의 문제라는 것을 말하고 싶었습니다. 잘 표현이 안 된 것 같아 조심스럽네요.
    사회생활하다보면 남성분들도 윗사람들에게 어마어마하게 당하죠... 그 일환에서 보고 싶었습니다.
  • twhoi 2018/03/13 12:45 # 삭제 답글

    no 라고 말할수 있는 사람은 인생 편하게 산 사람일까?
    말하라고 하는 사람은 인생 편하게 산 사람일까?
    오히려 경험이 많은, 좆되본 경험이 많을수록 노라고 말할수 있는거 같은디..
  • marroni 2018/03/13 19:31 #

    경험이 많고 ㅈ되본 경험이 많은 사람이 될 즈음에는 이미 권력을 행사하는 사람이 되어 있을 확률이 높죠^^
    아 그리고 no 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 왜 No라고 당당히 말하지 못해! 라며 비난하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 ㅏㅏㅜㅇ 2018/03/13 15:33 # 답글

    갑분싸 란 말이 생각나네요
  • marroni 2018/03/13 19:21 #

    넵 맞습니다 ㅎㅎㅎ 사회생활에서 젤 두려운 것은 내가 갑분싸 가 되는 것 ㄷㄷㄷ......
  • 그레이오거 2018/03/13 19:10 # 답글

    문제는 그렇다고 '권리 위에 잠자는 자는 보호받지 못한다'는 법의 대명제가 변할리도 없다는 점입니다.

    영화와는 달리 부당한 피해를 입었을때 가만히 있어도 알아서 해결해주는 영웅은 없습니다. 말씀하신대로 사회는 영웅을 기준점으로 삼아서도 안되고요. 다행이라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점점 발전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점일까요.

    강제적인 해결은 생각보다 오래 안걸릴 수도 있습니다. 기술 발전으로 24시간 내 주변 환경을 쉽고 값싸게 기록할 수 있는 블랙박스? 정도만 개발되더라도(사실 이 정도는 비용만 들이면 지금도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됩니다. 증거능력 100% 확보기 때문에 원터치로 간편하게 사법기관에 전송 가능하고 그럼 무서운 사람들이 슥 잡아가는거죠. 주변 사람들은 뭐가 원인인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해결되는겁니다. 물론 당사자는 일체 손해 걱정 없이 우아하게 사이다 들이키면 되는거고요. 시범 케이스 몇 건만 벌어지더라도 꼰대들 싸악 쪼그라들걸요. ㄲㄲ
  • marroni 2018/03/13 19:23 #

    옳으신 말씀. 권리 위에 잠자는 자는 보호받지 못하는 것은 변하지 않겠죠.
    권리 행사가 잠자는 것보다 개개인의 머릿속 계산기에서 더더욱 무겁게 느껴지도록 사회가 변화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 제트 리 2018/03/13 22:36 # 답글

    솔직히 그런 핀잔 주는 사람에게 되 물어 보고 싶어 지더군요... 과연 그들은 no 라고 할 수 있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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